며칠 전에 백희나 작가의 책을 손에 잡히는 대로 빌려 왔어요. 아이가 한 번 읽은 책은 아주 재밌지 않고서는 다시 읽자고 안하는데 이 책은 재밌으니 또 읽자고 해서 며칠째 읽는 중이에요.
뻔하지 않게 글을 쓰는 백희나 작가답네요. 「신데렐라」, 「콩쥐팥쥐」류의 책에 '새엄마', '계모'라는 단어를 쓰지 않을 수 있다니요. 대신 작가는 신선하게도 '나이든 여인'이라고 씁니다. 그저 '연이는 나이 든 여인과 같이 살았어.'라고 써요. 그 '나이든 여인'은 연이를 학대하지만 이에 대해서도 '나이 든 여인은 연이에게 일을 아주 많이 시켰어.'라고 말할 뿐이지요. 연이라는 연약한 소녀가 이 나이든 여인과 왜 함께 사는지, 그 여인은 왜 이 소녀에게 일을 아주 많이 시키는지 굳이 이유를 말해주지 않아요. 나이든 여인은 마녀도 아니고 새엄마도 아닙니다. 모호한 관계 그대로 놔둡니다. 이 지점에 대해 아이가 질문할지 모른다고 생각했는데 제 딸은 전혀 의문을 갖지 않았어요. 그래서 저도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요. 👀
보통 계모 모티브 이야기에는 친엄마의 죽음과 새엄마의 등장, 새엄마의 모진 학대가 등장하는데, 「연이와 버들 도령」에서는 엄마를 지웠습니다. 행복이나 따뜻함, 인간애를 느껴본 적 없는 '어린 여자애'와 역시 행복을 느껴보지 못했을 법한 외롭고 우울한 '나이든 여인'의 삭막한 동거를 그려놓았습니다. 여기에서 저는 이 이야기가 「신데렐라」, 「콩쥐팥쥐」쪽이 아니라 「라푼첼」쪽인 것 같았어요. 혼자 사는 '나이든 여인'(마녀)이 남의 아이를 훔쳐서 키우는 이야기.
나이든 여인이 연이 몰래 버들 도령을 찾아가 달려들며 "니가 감히 우리 연이를 꾀어내!"라고 말하면서 불을 지르는 장면에서 특히 그래요. 훔친 딸 라푼첼에 집착하던 마녀가 "니가 감히 내 딸을...!" 하면서 왕자를 추락시키는 장면과 오버랩되는군요. 이 여인들은 신데렐라나 콩쥐의 계모가 가졌던 종류의 탐욕이 아니라 훔친 딸에 집착하는 모습을 보입니다. 라푼첼을 기른 마녀는 라푼첼을 세상과 단절시키고자 성에 가둡니다. 연이와 함께 사는 나이든 여인 역시 연이를 자신의 세계 안에 가두고 소유하고 지배하려 듭니다. 이들은 딸들이 세상과 연결되는 것을 '빼앗긴다'고 인식하고 분노합니다.
어린 여자애 연이는 신기루 같았던 동굴 너머의 밝은 세상이 잿더미로 변하고 자신에게 처음으로 따뜻한 밥상을 차려주고 다정하게 대해주었던 버들 도령이 불에 타 뼈만 남았는데도 그리 슬프지 않습니다. 연이의 지금까지의 생이 잿더미 같았고 무덤 같았기 때문이지요. 살살이, 피살이, 숨살이 꽃이라는 신물 덕분에 버들 도령이 살아난 뒤에야 비로소 눈물이 납니다. 라푼첼의 뜨거운 눈물이 왕자의 눈을 뜨게 하는 것과 달리 버들 도령이 살아난 뒤에야 연이가 눈물을 흘립니다. 타인의 치유가 아닌 주인공 자신의 치유가 이 이야기의 종착지입니다.
나이든 여인의 종착지는 어디였을까요.
고독과 죽음입니다. 나이들어 아무도 없이 혼자 죽었다고 하니, 고독은 길었고 삶은 지옥같았을 겁니다. 더딘 죽음이 그에게는 형벌이었을지도 모르겠어요.
✔ 이 책을 읽으면서 아이와 나눈 소소한 이야기
"우리는 오늘 저녁에도 상추를 먹었는데, 이 때는 겨울에 상추 구하기가 어려웠나봐?"
"이것 봐. 동굴 밖은 겨울인데, 여기는 화사한 꽃들이 만발하고 옥토끼도 있어. 와~ 이런 멋진 곳이 있다니."
"솥뚜껑에서는 예쁜 화전이 익어가는데, 나이든 여인은 씩씩거리며 어디를 가고 있나?"
😜 25년 새해 다짐으로 매일 글을 한 장씩 쓰겠다고 해놓고 실천을 못했는데, 새해의 56일이 지나서야 처음으로 글을 썼어요. 내일 딸한테 보여주고 도장 받을 거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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