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아이는 만3세 무렵에 조금씩 한글을 익히기 시작해서 만 3~4세에 읽게 되고 조금씩 써보면서 만5세인 지금은 이것저것 쓰고 놉니다. 이야기도 지어보고, 놀이할 때는 필요한 간판도 쓰고, 편지도 쓰고 메모도 하고요. 물론 아직 맞춤법은 많이 미숙해요. 같은 유치원 친구들도 이제는 한글을 제법 알고 쓰기 때문에 사실 뭐 특별할 것은 하나도 없어요. 그저 이 나이 아이들 비슷한 수준입니다. 다만 아이가 외동이고, 유치원이든 어디에서든 한글 교육을 따로 받은 적 없고, 또 엄마인 제가 아이 한글 교육으로 스트레스를 받은 적이 없다는 점에서 나의 노하우가 어쩌면 누군가에게는 도움이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서 이 포스팅을 씁니다.
제가 아이 한글 교육 때문에 스트레스를 받지 않은 이유는 '보통 수준의 지능을 가진 아이라면 때가 되면 다 한글을 읽고 쓸 줄 안다'라는 믿음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핀란드에서는 만6세에 글자교육을 시작한다고 하니까 우리나라로 치면 초등학교 들어가서가 되겠지요. 저는 이른 글자교육이 나쁘다고 생각하지는 않고 만3세 무렵에 학습식으로 글자를 가르치는 것은 비효율적일 뿐 아니라 아이에게 나쁠 가능성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비효율적인 방법으로 교육하면서 그나마 전혀 화내지도 강요하지도 비교하지도 비난하지도 않고 그저 부처님 미소만 지을 수 있다면 나쁠 것 까지는 없겠지만, 그럴 수 없다면 나쁜 것 아닐까요?
칼 비테가 자녀에게 글자교육을 시킨 때가 3세였던 점이 어쩌면 제가 만3세 무렵에 슬슬 아이에게 글자를 보여주기 시작한 계기가 되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자녀 교육서를 많이 읽진 않았지만 가장 열심히 읽었던 책이 「칼 비테의 자녀교육법」이었으니까요.
결과적으로 어떤 과정을 거쳤는가를 보면 1단계는 낱글자 익히기(+소리값도 제시), 2단계는 자모음 조합 익히기(소리값 깨우치기), 3단계는 낱글자의 받침 소리 익히기 이런 순서였던 것 같아요. 그러면서 자연스럽게 쓰기로 이어지게 하는데 그때는 동기 부여, 쓸 기회 만들어주기 등의 방법을 이용했습니다.
1단계 낱글자 익히기는 글자를 보여주고 만지게 하려고 자석 글자를 이용했습니다. 처음에는 세 식구가 앉아서 "여기 글자들이 있네. 여보 기역이 어디 있지요?" "아빠가 기역을 찾았네. 와 아빠 잘 찾는다."하면서 부모가 글자 몇 개를 가지고 각 글자에 이름이 있다는 것을 보여주었습니다. 하지만 곧 '아, 나는 칼 비테가 아니야.' OTL...칼 비테를 따라하려고 했는데 이걸 어떻게 이끌고 가야할지 솔직히 모르겠더라구요. 그래서 작파하고 내 식대로 다시 했습니다. 아이 재운 뒤 식탁 위에 3~4개의 글자를 올려놓습니다. 아침에 일어나 식탁에 앉았을 때 "어? 이게 뭐야? 여기 글자 과자가 있네." "이건 기역이야. 아이 딱딱해. 기역 니은 디귿은 딱딱하다. 안 되겠어. 엄마는 아침에는 자음 과자는 싫어. 부드러운 모음 수프를 먹고 싶어. 잠깐 기다려. (모음을 가져와서) 아야어여는 부드러워. 아, 부드러운 모음 수프. 아침에는 모음 수프가 최고지." 이러면서 글자 이름을 알려주고 각 글자들을 자음과 모음으로 슬쩍 분류도 해줍니다.
이렇게 글로 옮겨놓으니까 뭐 거창한 것 같지만 사실은 생각나는대로 이야기 지어내면서 설렁설렁 했어요. 매일 하지도 않았구요. 그런데 이렇게 음식 재료로 글자를 이용하니까 아이가 재미있었는지 자석 글자를 이용해서 혼자 요리 놀이를 했어요. 아이가 자석 글자들을 그릇에 담아서 저를 주면 "지금은 기역, 미음, 리를만 먹고 싶어. 다른 건 싫어." 하면서 낱글자의 이름을 익히게 했고, "엄마는 지금 쿠키를 좀 먹고 싶어. 훌훌 마시는 수프 말고. 딱딱한 자음 쿠키를 좀 줄래?"라고 하면서 글자를 자음과 모음으로 분류하도록 했습니다. "이건 기역이야 그그그. 이건 아야 아아아. 그에 아를 더하면 가가 돼." 라고 하면서 소리값도 한 번씩 말해주었어요. 천천히 했어요. 아주 천천히요. 자주 빼먹었고 나중에는 잊어버릴 때가 더 많았고 아이가 글자 요리를 해올 때만 응대했습니다. 혹시라도 아이의 흥미를 아예 멈추게 할까봐 아이가 관심이 없을 때는 딱 멈추었어요. 그래도 24개의 글자 이름 외우기가 그렇게 어려운 일은 아닐 것입니다. 하루에 한 개씩만 외워도 한 달 안에 끝납니다. 저희는 사실 얼마나 걸렸는지는 모르겠어요. 그냥 아이나 나나 생각날 때 한 번씩 천천히 했으니까요. 이렇게 포스팅을 할 줄 알았다면 기록을 해놓는 건데!
2단계 자모음 조합 익히기는 각 낱글자의 소리값을 깨우치는 데 효과적입니다. 이건 자모음 조합표를 식탁 앞에 붙여놓는 것으로 해결했습니다. 그 전부터 차 타고 어디 갈 때 "너 엄마 하는 소리 따라 할 수 있어? 간장 공장 공장장은 ~~" 이런 말놀이를 하면서 한 번씩 "이것도 할 수 있어?" 하면서 "기니디리미비시이지치키티피히, 교뇨됴료묘뵤쇼요죠쵸쿄툐표효, 가나다라마바사아자차카타파하" 같은 자모음 조합표도 슬쩍슬쩍 끼어넣었습니다. 저희 아이 네다섯 살 때는 재밌다고 따라했어요. (아이가 10월 생이라 다섯 살 9월까지 만3세.) 요새 아이들 이런 건 여섯 살 지나면 공부라고 안 하려고 할 수 도 있어요. 식탁 앞 벽에 웬 표가 붙으니까 아이가 호기심을 갖고 보았어요. 자기가 아는 낱글자들이 가로 세로 써있고 중간에는 처음 보는 글자들이 써있겠지요. 이때는 그냥 정석대로 따라 읽게 했어요. 한 번씩 아이가 먼저 읽자고 할 때도 있고 제가 먼저 읽자고 할 때도 있었던 것 같아요. 큰소리로 리듬감 있게 읽는 게 좋아요. "자음(기역부터 히읗까지)에 아를 붙여보자", "기역에 모음(아야어여오요유유)을 붙여보자." 하는 식으로 가로세로를 한 번씩 큰 소리로 리드미컬하게 읽어보는 거예요. 저는 직접 네임펜으로 써서 붙였었는데 지금은 떼버리고 없어요. 이렇게 몇 번 하다보면 아이의 글자 읽기가 거의 다 됩니다. 차 타고 지나가면서 간판을 읽어나가는게 그 시그널입니다.
3단계 받침 글자는 <한글 용사 아이야>의 도움을 받았습니다. 제가 먼저 시청을 해보고 자모음 조합편은 건너뛰고 받침 글자편부터 시작했어요. 아이는 엄청 재밌게 봤고, 받침 글자를 제법 잘 알게 되었어요. 다행히 받침 글자 끝나고 더 보여달라고 조르지는 않았습니다. 더 보여달라고 하면 더 보여주면 되지 않을까요? 너무 쉬운 길을 택하는 건가 망설이기도 했지만 결과적으로 아이에게 받침 글자의 소리값을 알게 해주는 유익한 콘텐츠였습니다.
사실 만6세의 인지력이라면 24개의 낱글자 익히기도 쉬울 뿐 아니라 자모음 조합표 익히기도 큰 소리도 몇 번 반복하면 금방 익힐 수 있다고 믿기 때문에 "때 되면 한글 다 읽고 쓴다"고 자신했던 거예요. 이건 제가 한글 뗄 때의 경험에서 나온 자신입니다. 초등학교 (당시 국민학교) 들어가기 한두 달 전에 자모음 조합표를 반복해서 큰소리로 읽으면서 한글을 깨쳤던 경험을 통해 자모음 조합표를 반복해서 따라하다보면 낱글자가 어떤 소리가 나는지 저절로 깨우치게 된다는 걸 알았습니다. 글자를 깨칠 때의 그 쾌감이라니! 지금도 생생합니다. 하지만 평범한 지능의 만3세가 자모음 조합표를 통해 소리값을 반나절만에 깨우치는 것은 조금 어렵지 않을까 생각됩니다. 자모음 조합표 만으로 아직 자음의 소리값을 제대로 깨우치지 못했기 때문에 받침 글자 교육이 따로 필요했던 것 같습니다. 소리값만 제대로 깨우쳤다면 받침 소리도 자연스럽게 깨우쳤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이 무렵에 자주 했던 게임이 끝말 잇기 게임입니다. 처음에 부모가 끝말잇기 게임을 하면서 시범을 보여주면 아이도 재밌게 할 수 있게 됩니다. 이건 글자들이 어떻게 활용되는지 이해하기에 좋은 게임입니다. 낱글자가 더해져서 단어들이 만들어지고 그 단어를 이용해 재밌는 게임도 할 수 있으니까 글자에 대한 호기심과 호의를 갖게 됩니다. 차 안에서 하기 좋은 게임 같아요.
집에서 엄마가 대하소설을 많이 읽으니까 자기도 책에 1,2,3 같이 숫자가 적힌 걸 읽고 싶다고 해서 만4세 후반 무렵에 말놀이 동시집 1~4를 혼자 읽고 다섯 권 정도 더 읽었어요. 그런데 이후로 혼자 읽기를 안 하고 저한테 읽어달라고 하더라구요. 읽기 독립을 별로 원하지 않았어요. 칼 비테는 아이한테 책을 안 읽어주고 대강의 줄거리 정도만 알려주고 더 궁금하면 혼자 읽게 했다던데 저는 그냥 읽어줍니다. 칼 아저씨는 바쁘다는 핑계가 통했지만 저야 뭐 그렇게 바쁜 것도 아니구요. 밤에 자기 전에 2~3권 정도 읽는 게 우리집 루틴이에요. 아이가 아직 자연스럽게 읽기가 어려운가 보다 했는데, 어젯밤 한 번 읽은 책을 또 읽어달라고 해서 아이한테 읽어보라고 했더니 아주 유창하게 읽었어요. 실은 저도 놀랐어요. 작년에 비해 아이가 또 더 자랐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
집약적으로 가르쳐서 빠르게 결과가 나오기를 바란다면 저의 방법이 아주 따분하고 복잡하게 생각될 수도 있을 것 같아요. 하지만 아이에게 필요한 것을 천천히 일상 생활 중에 하나씩 알려주는게 부모의 일이니까 이 정도는 해볼 만 하지 않을까요?